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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3대소프라노 신영옥 나이 성악가 결혼 어머니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신영옥. 

명실공히 세계 최정상급 성악가들과 한 무대에 서며 활약한 그녀. 

막내딸의 든든한 후원자로 평생을 바친 아버지. 

그리고... 그녀에게 전부였던 한 사람, 어머니. 

은빛 무대에서 부르는 애끓는 사모곡 성악가 신영옥의 인생이야기가 26일 티비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를 통해 방영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3대 소프라노로 조수미, 신영옥, 홍혜경이 꼽히죠.

소프라노 신영옥은 1978년 선화예고 2학년 재학중 국내에서 열린 동아콩쿠르에서 3등을 했습니다. 이후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오늘날 세계 성악가들에게 꿈의 무대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좌를 휩쓸고 있습니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국내 경향·이화콩쿠르에서 1등을 하지 못하자 국내 음악계의 풍토에 한계를 느끼고 초등학생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나 크게 성공한 것과 상황은 다르다해도 국내 음악계가 되짚어볼 의미가 있는 기록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961년생으로 올해 나이 59세인 신영옥 고향은 서울 출생입니다. 

아버지는 이북 출신으로 사업을 했다고 합니다. 일찌기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4세 때 KBS 오디션을 보고 합창단 활동을 했고, 초등학교 때는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해외공연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때 가야금 춤 성악 등 다양한 예술을 익히고 선보인 것이 오늘날 세계 오페라무대에서 청중들을 사로잡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습니다.



신영옥은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난 나이임에도 아직 미혼 싱글녀로 알려져 있는데요. 결혼한 적이 없기에 당연히 남편도 없고, 포털에 연관검색어로 나오는 '신영옥 남편', 결혼 같은 단어는 루머일뿐입니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연애와 결혼에 대하여,,,

신영옥 - "(연애를)안 했을 리가 없죠.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남자는 도망가고…. 중매가 들어오는데, 저는 변호사 의사 같은 '사' 자는 별로예요. 결혼하고 싶지만 혼자서도 잘해요. 집 안에서 전구 갈고, 못 박고, 액자 걸고, 막힌 욕조 뚫는 걸 직접 다 합니다. 그런 일이 재미있어요. 망치가 종류별로 있고, 다른 용구들도 거의 다 갖추고 있어요. 제가 10년 된 분장용 눈썹을 보여주면 친구들이 기절해요. 오페라단에서 유일하게 저는 직접 분장해요. 면도칼, 핀, 족집게 등을 트렁크에 늘 넣어 다녀요. 그러니 제 짐이 항상 많아요." 





선화예술학교 성악과를 장학생으로 입학해 중학과정을 마치고 선화예고로 진학한 신영옥은 소프라노 조수미의 고교 1년 선배이기도 합니다.


조수미는 선화예고 교내외 행사에서 주역을 도맡아 했던 당시 신영옥 선배의 활약을 보며 내일을 기약했고 서울대를 거쳐 이탈리아로 유학해 85년 비오티콩쿠르에서 우승하는 등 먼저 세계 무대에서 활약을 시작했습니다.



선화예고 2학년 재학중 1979년 미국 뉴욕 줄리아드 음악대학교로 먼저 유학을 갔던 신영옥은 유럽으로부터 들려오는 후배 조수미의 잇단 국제 콩쿠르 입상소식에 자극받아 1990년 쿠세비츠키 콩쿠르에 나가 우승을 하고 같은 해, 세계 3대 오페라단으로 꼽히는 메트로폴리탄 콩쿠르에서도 입상하게 됩니다. 



신영옥은 1991년 메트로폴리탄에 데뷔 무대를 가진 이후 2006년까지 전속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영국의 로열오페라 하우스, 프랑스의 바스티유 오페라, 독일의 쾰른 오페라, 이탈리아의 레지오 극장 등 유명 오페라단에서도 공연했습니다. 오늘날까지 메트로폴리탄이 가장 아끼는 소프라노중의 한명으로 활약중인 신영옥은 현재는 프리랜서입니다. 뉴욕의 매니저가 그녀의 공연 스케줄을 관리합니다.



신영옥은 데뷔 2년 만에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상대역을 맡아 클래식계를 놀라게 했고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등과 한 무대에 섰습니다. 국제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며 홍혜경, 조수미와 더불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프리마돈나로 불립니다.


메트로폴리탄 콩쿠르에 우승한 뒤 무대에 설 기회가 온 것은 1991년 겨울이었습니다. 베르디의 '리골레토' 공연 때 신영옥은 공연장의 '대타(代打)석'에 앉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날 여주인공 '질다' 역은 홍혜경. 하지만 당시 홍혜경이 감기에 걸려 공연 중간에 빠지게 됐고...



신영옥 - "연출진에서 대타석에 앉아 있던 내게 분장실로 빨리 따라오라고 했어요. 하늘이 노랬어요. 화장실도 급했어요. 가발은 크고…. 제게 주어진 첫 장면은 맨발로 '아버지!' 하며 뛰어나가는 겁니다. 관객들이 개미알처럼 보였습니다. 그 뒤로 이 오페라 공연의 배역 명단에 제가 들어갔지요."



신영옥 - "1993년 일본에서 파바로티와 '사랑의 묘약' 공연을 했지요. 워낙 육중한 몸이라 거동하기 힘들어 우린 그가 묵는 호텔 객실에서 리허설을 했지요. 그때 파바로티를 처음 만났죠. 그런데 나를 향해 꽥 소리 질렀어요. '왜 날 쳐다봐. 관중들이 네 엉덩이를 쳐다보기 위해 500불 입장료를 내는 줄 알아.' 

신영옥 - "성악가는 늘 관객을 쳐다보며 노래 불러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상대 역(役)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노래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하지만 그때 저는 막 데뷔한 직후라 그저 너무 놀라 울먹였어요."



신영옥 - "그가 육중한 몸을 내게 기댄 채 아리아 '몰래 흘리는 눈물'을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거의 스테레오를 옆에 둔 기분이었지요. 노래가 쩌렁쩌렁 울리면서 쫙 뻗어나가요. 그는 커튼콜을 받고 인사할 때 장난스럽게 쪽쪽거리며 내게 10번이나 키스했어요. 그 뒤로 7번을 더 함께 공연했지요.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성악가예요."





신영옥 어머니


현재 미국 뉴욕에서 생활하는 신영옥은 올해로 89세인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돼 자주 한국을 찾는다고 합니다. 20년 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일이 한으로 남아서라고...



신영옥 - "늘 가족이 그리워요. 아버지가 저를 보고 싶어해 한국 공연을 자주 하려고 해요. 여기 오면 늘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합니다. 지금도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버진 저를 '이쁜이'라고 불러요. 내심 제가 결혼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아요."



무대에서 신영옥은 성공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1993년 간암으로 숨졌습니다. 임종 직전까지도 딸의 공연에 지장을 줄까 봐 알리는 것을 막았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닷새 뒤에나 알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여행용 트렁크에 부적(符籍)처럼 어머니의 내복, 낡은 옷가지를 넣어 다닌다고 합니다.



1992년 4월, 몇 년 만에 돌아온 한국. 신영옥은 엄마가 곁에 있어도 엄마가 그리웠습니다. “엄마, 엄마” 하며 서른을 갓 넘긴 처녀가 엄마에게 몸을 기대고, 가슴에 머리를 박고, 팔짱을 끼며 갖은 애교를 떨었습니다. 이상한 예감이라도 들었던 걸까. 며칠 뒤 신영옥은 공연을 위해 멕시코로 떠났습니다. 몸이 성한 엄마를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신영옥 어머니 김정숙(1993년 작고)에게 신영옥은 언제나 ‘우리 영옥이’였습니다. 미취학 아동들로 구성된 KBS 애기노래회에 호평을 받으며 최연소로 입단한 네 살 때, 어머니는 직감했습니다. 자신이 다하지 못한 성악의 꿈을 이뤄 줄 막내딸. ‘우리 영옥이 목소리는 최고야.’ 

신영옥은 KBS 어린이합창단, 리틀엔젤스를 거치며 노래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하는 솔로(독창자)를 도맡았고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어머니의 꿈은 커져만 갔고, 자신의 모든 걸 막내딸 신영옥에게 걸었습니다.

언니가 둘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신영옥만이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습니다. 두 언니가 고무신을 신을 때 신영옥은 구두를 신었습니다. 두 언니가 시장 옷을 입을 때 신영옥은 양장점에서 맞춘 아동복을 입었습니다.



끔찍이 막내딸 신영옥을 아낀 만큼 어머니는 관리에도 신중하고 엄격했습니다. 등하교 시간과 성악을 배우는 시간, 집에 오는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했습니다. 이성 교제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냈고, 목과 몸에 좋다는 음식이 항상 상에 올랐습니다. 주위에서는 ‘극성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고 채찍질만 한 것은 아니었으니... 내성적이고 꽁하기 잘 하는 신영옥과 티격태격한 뒤 화해의 손을 내미는 쪽은 십중팔구 털털한 어머니였습니다.



파바로티와의 공연 못보고 떠난 어머니

 

“얘, 얘, 가만있어 봐. 어제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두 분 돌아가셨어. 딴 사람들은 죽어 나가는데 나는 괜찮아.” 1993년 1월, 수화기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의외로 활기찼습니다. 어머니는 그 전해, 간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진짜 기적이라는 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는 그해 5월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미국 메트로폴리탄오페라의 ‘사랑의 묘약’ 공연에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신영옥이 당대 최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처음 호흡을 맞추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 공연 한 달 전, 어머니는 세상을 떴습니다. 세계 성악가들이 선망하는 메트에 딸을 올려놨지만 딸이 그 무대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엄마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신영옥은 외국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어머니가 갖고 싶어 하던 지갑, 가방이 눈에 들어올 때가 많다고 합니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 사드렸네.’ 엄마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신영옥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10년을 넘게 틈만 나면 울었습니다. 삶의 버팀목이었던 어머니는 꿈에도 자주 나타났다고 합니다.

신영옥 - "이제야 이렇게 스스로 설 수 있게 됐는데 엄마는 이 세상에 안 계시네요.” 



미국에서 신영옥의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회계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자잘한 청구서가 많이 날아오는 겁니까?” 노숙인, 환경미화원, 소아당뇨병 환자 등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돕는 단체들의 기부금 용지였습니다. 

생전에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돕던 어머니가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이루는 건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네 달란트(능력)가 항상 남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해다오.” 신영옥은 다시 엄마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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