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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집, 양희은 남편 조중문 직업 나이 종교, 난소 암 투병


집사부 힌트 요정으로 전화 목소리 출연한  개그우먼 김숙은, "대한민국 역사의 현장엔 늘 이분의 목소리가 있었다. 최근에는 월드 스타 방탄소년단이 존경과 감사를 표했다"라고 집사부에 대해 언급했는데요.

이에 멤버들은 "이 정도면 거의 종교 지도자나 교황 아니냐"며 들뜬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어 김숙은 "난 이분 목소리만 듣고도 무서워서 도망간 적이 있다. 굉장히 예민하신 분이니 오늘 바짝 긴장해라"고 조언했고, 멤버들은 "연예계에서 가장 겁이 없는 김숙 씨도 무서워하는 분이라니" "오늘 두 명은 울겠는데"라며 바짝 긴장했습니다.



집사부일체 예고편에서, 집사부 집을 방문해서 사고를 치는 멤버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는데요.

공개된 집사부의 집은 낯이 익은데 바로 일전에 '여유만만'에서 공개된 바 있는 가수 양희은 집이더군요.

이번주 '집사부일체' 집사부는 가수 양희은입니다.



일전에 '여유만만'과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된 양희은 집은 경기도 일산 동구에 위치한 2층 전원주택이었는데요.

올해로 23년째 살고 있다는 단독주택입니다. 양희은 집 근처에 동생 양희경 가족 집도 있다고 합니다.

양희은 집은 전체적으로 원목의 갈색과 흰색으로 인테리어되어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고, 양희은 집 밖의 담장 역시 다른 집보다 낮기 때문에 열린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또한 집안 곳곳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미술작품, 공예품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열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양희은 어머니의 솜씨라고 합니다.


가수 양희은은 중후한 성량, 심금을 울리는 음색을 갖춘 한국 포크송의 거목과도 같은 가수죠. 특히 노래로 구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대한민국에서 따라올 가수가 없습니다.

한국 포크송 가수로 살아있는 전설인 양희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양희은 본명이구요.

나이, 생년월일 1952년8월13일생으로 올해 나이 68세입니다. 고향은 서울 종로구 가희동에서 출생했구요.

학력, 서울재동초-경기여중-경기여고를 졸업해서 서강대학교 사학과 학사. 종교는 개신교인데, 양희은이 결혼할때 주례를 유병언이 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루머일뿐 진위여부가 확인된 바 없고, 이후 구원파와 연관된 활동이 있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양희은 가족 중에 친동생이 배우 양희경이죠. 양희은 키 관련 정보는 공개된 바가 없네요.




1971년 노래 '아침이슬'로 데뷔한 양희은은,

이후 '아름다운 것들', '한사람'  '들길 따라서', '하얀 목련', '한계령', '그해 겨울', '일곱송이 수선화' '작은 연못'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 '상록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네 꿈을 펼쳐라',  '엄마가 딸에게' 등 수많은 히트곡을 냈는데요. 제 3공화국과 제 4공화국 당시에서 30여곡이 금지곡으로 선정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합니다.

양희은 1집과 20주년 기념앨범은 각각 67위와 91위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었습니다.


양희은 어린시절 모습

어릴적 양희은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서북청년사건때 진남포에서 단신으로 남하한 양정길이었는데, 육사 4기 포병장교를 거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고 육군 대령으로 예편이후 병으로 요절합니다. 어머니 윤순모는 서울예대 성악과 출신의 디자이너였습니다.

양희은은 3자매중에서 장녀였고, 여동생이 바로 유명 배우 양희경이고 양희경 노래실력 또한 수준급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외도를 하고 새엄마가 들어오게 되면서 양희은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가슴속에 품습니다. [양희은 아버지 이혼과 재혼]. 그 후 양희은이 13살 무렵 아버지가 39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가세가 기울게 되죠.


양희은 젊은시절 사진


이후 양희은 친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하는데, 어린 양희은 역시 맏이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19살때부터 직업 가수의 일을 시작합니다. 양희은이 송창식에게 일자리를 부탁했고, 송창식은 명동의 맥주집에서 자신의 공연시간 중 일부를 떼어주어서 어린 양희은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줬다고 합니다.

 

양희은의 성격은 어릴 적부터 강직했습니다. 선배 가수 조영남이 이런 평가를 할 정도였죠.

조영남 - "양희은은 무경우의 천적(天敵)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무경우가 발견되면 그녀는 즉시 독립투사형 훈육주임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싸워서라도 시시비비를 가린다. 그러나 후배들을 다독거릴 때는 천하에 싹싹 상냥무쌍한 큰언니가 된다."


양희은 젊은시절 모습


대학시절 양희은은 끼니는 물론이고 교통비조차 없어서 걸어다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노래를 해야만했고 공부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대학 졸업하기까지 8년이 걸립니다.
그렇게 양희은은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하여 자신의 이십대를 다 바치는데, 삼십대가 되자 큰 병에 걸립니다.

 


양희은 난소암 말기 시한부 판정


양희은 - "20대에 집안 빚 갚고, 두 동생을 대학 보내고 시집가는 것까지 보느라 내 손으로 월급을 만져본 기억이 없다. 힘들어서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는데 병이 찾아왔었다."(1982년)

바로 난소암이었습니다.


양희은 - "1982년 여름에 첫번째 수술을 했어요. 당시 (자궁)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선생님께서는 예상했던 것보다 몇배 긴 시간을 들였어요. 여성호르몬과 목소리는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수술을 하면서 한쪽 난소만이라도 남겨놓으려고 애를 쓰셨던 거죠."

난소암 말기로 시한부 3개월이라는 판정을 받았던 양희은이지만 동생과 식구들의 정성어린 간호로 병을 치료하는데 성공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긴 했으나 병의 후유증으로 이후 불임이 됐습니다.


양희은 젊은시절 모습


양희은이 난소암으로 투병중일 때, 1983년에 '하얀목련'을 내고 다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가 난소암 판정을 받고 투병중일 당시, 청계천에 양희은의 앨범이 날개 돋힌듯 팔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양희은이 수소문해 알아보니 당시 꽤 유명한 음반 도매상이 '양희은 난소암 판정, 전집 판매' 현수막을 걸고 음반을 팔고 있었던 것.

이에 화가 난 양희은이 사람이 아픈걸 홍보 수단으로 쓸수있냐고?!이럴수가 있냐?! 고 따졌더니 그 도매상이 '억울하면 신곡 발표 하든가'라고 응수하자 이 곡으로 다시 복귀한것이라고... 원래는 다른 가수에게 갔으나 거절당한 노래에 가사를 다시 붙혀서 발표했다고 합니다.




양희은 남편 조중문 첫만남과 결혼


우여곡절 끝에 난소암을 극복하고 다시 가수로 복귀한 양희은은 우연히 1987년 뉴욕의 한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조중문을 만나게 됩니다. 두사람이 처음 만날 당시 양희은은 36살, 조중문은 39살이었다고 하네요.

양희은 남편 조중문 직업 사업가, 정확하게는 미국 맨하튼에서 직원 18명이 일하는 대형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사장이었다고 합니다.



양희은 조중문 두 사람의 만남에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네요.


조중문 - "고기 드실래요?"

양희은 - "저 고기 별로 안 좋아해요."

양희은은 그러면서도 조중문을 따라 식당에 갑니다. 그리고 고기 7인분을 먹게 되죠. 그러자 조중문이 놀라서 말합니다.

"고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시더니..."

양희은 - "고기를 안 좋아한다고 했지. 많이 못 먹는다고는 안 했잖아요."


양희은이 고기를 안좋아한다는 것도 맞고, 대식가인 것도 맞는 말이죠.

조중문은 당시 양희은의 솔직 당당한 매력에 반하게 됩니다.



이렇게 첫만남 후에 두 사람은 불과 3주만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미 첫만남부터 서로의 매력에 깊이 빠져든 둘은 이후 평생을 같이하는 동반자가 되죠. 이렇게 결혼한 이후 양희은은 미국에서 평범한 주부 생활을 합니다. 조중문이 자신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에서도 양희은이 절대 일하지 못하게 한 것이죠.

 

조중문 - "결혼하기 전까지 집사람이 쉬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저는 결혼과 동시에 집사람이 일에서 좀 풀려났으면 싶었어요. 일을 잊고 집에서 살림만 하기를 바랐던 것인데 오히려 집사람에겐 그게 불만이더라고요."

아내에 대한 조중문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네요.



그렇게 신혼생활을 보내던 양희은은 다시 난소암이 재발하고 맙니다(1989년). 

5년전에 한쪽을 남겨두었던 자궁쪽에도 문제가 생긴 것이고, 양희은은 결국 불임이 되고 맙니다.

양희은 - "남편은 (아이를 못 낳는 것에 대해) 쿨하게 '그냥 살면되지' 이렇게 말해줬다. 참 고마웠다."

자녀도 없는 미국 생활은 많이 권태로웠고, 양희은의 몸안에는 가수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조중문은 아내를 위해서 1993년 미국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평범한 가정 주부로 지내던 양희은이 다시 가수로 복귀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던 중, 이번에는 조중문에게 병마가 찾아옵니다.

양희은 - "어느 날 남편이 차 시동이 안 걸린다더라. 손목도 못 움직이는 상태가 시작이었고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왔다.

남편의 류마티스는 갈수록 심해졌으나 약도 맞지 않아 부작용에 시달리며 통증이 지독해 잠을 못 잤다."

양희은 - "처음으로 내가 일을 그만두고 남편을 간병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도, 살아줄 수도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



양희은 - "남편이 통증으로 잠을 설치는 것은 다반사고 아주 짧은 거리를 걸어가는데도 어기적거리고 너무 힘들어했어요. 밥숟가락을 들어올리면서도 진땀을 흘렸고, 승용차에 겨우 앉아 키를 꽂은 다음에도 손목이 아파서 키를 비틀지 못해 시동을 걸 수 없었어요. 혼자서 치약을 짜지 못해 제가 아침마다 칫솔에 치약을 짜놓아야 할 정도였어요."

 

다행히 관절염의 권위자 재미교포 의사 김문호를 만난 후, 조중문의 류머티즘 증세는 크게 호전이 됩니다. 혼자 걸을 수 있고 혼자 변기에도 앉을 수 있게 된 것이죠.



비록 양희은 조중문 부부 사이에 자녀는 없지만,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것 같습니다. 인생의 동반자란 양희은 조중문 부부가 아닐까 하네요.

양희은은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이켜보면서 남편에 대한 소원을 하나 갖고 있습니다.

양희은 - "아버지는 39살에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 나이다. 이 남자에게 바라는건 끝까지 함께 가는거다. 나중에 35주년 기념 음반에 '당신만 있어준다면'은 그래서 나온 노래다. 그러다보니 삶의 가치, 결혼, 이 남자의 의미를 돌아보게 됐다."


또한 양희은은 늘그막에 그렇게 원망했던 아버지의 외도를 용서하게 됩니다.

양희은 - "아버지 나이를 넘기고 나서부터는 서른아홉의 남자를 보면 예사로 보이질 않아요. 아버지는 저때 돌아가셨는데 너무나 어린 남자더라고요. 진짜 철없이 딴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고 곁눈질할 수도 있고, 그런 어린 남자더라고요."


양희은의 노래에는 인생의 우여곡절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어서 그토록 심금을 울리는게 맞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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